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다 미츠나리 (문단 편집) === 오시 성 전투에서 드러난 무능한 군재 === 이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군재는 형편없었는데 [[후호조씨|호조]]씨 공략에서 잘 드러난다. 호조씨 공략 당시 미츠나리는 간토 평야 북부의 오시 성(忍城) 공략을 맡았는데 오시의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(成田氏長, 1542-96)는 오다와라 수비를 위해 성을 비웠기 때문에 아들 나리타 나가치카, 딸인 [[카이히메]](甲斐姫)가 겨우 병력 500여 명으로 지키고 있었다.[* 원래 오시 성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의 수는 1천 명이었으나 오다와라 성 공방전에 성주 우지나가가 주군과 가신의 약조에 따라 절반인 500명을 데리고 출정했기 때문에 오시 성을 수비하던 병력은 500명이 전부였다. 일설에는 가신과 농민을 포함해 3천여 명이 있었다고 추정한다.] 미츠나리는 [[오타니 요시츠구]], [[나츠카 마사이에]]와 함께 2만여 대군으로 몇 차례 공격을 가하나, 군관민이 일치단결한 오시 성의 저항에 패퇴하였다.[* 미츠나리의 무능도 한 몫 했지만 오시 성은 다른 성들과는 달리 큰 호수와 늪지대 위에 마치 '떠있는 듯이' 성이 세워져 공세자 입장에서는 [[오사카 전투]]처럼 호수를 다 메우지 않는 이상 공격로가 각 성문으로 이어지는 둑길 몇 개 외에는 전무 하다시피해 작은 촌성임에도 의외로 철벽 같았다. [[우에스기 겐신]]도 1574년에 오시 성을 포위했지만 조그만 성인데도 손가락만 빨다 철수했다고 한다.] 그래서 생각한 계책이 히데요시가 빗츄 다카마츠성(備中高松城)을 공략했을 때 쓴 수공. 그러나 정작 수공을 벌였는데 [[물]]이 역류해 미츠나리 군을 덮쳤고 물이 빠지고 난 뒤에는 전장이 진흙탕이 돼버려 오히려 공격이 더욱 어려워졌다. 결국 미츠나리는 소환되었고 오시 성은 오다와라 성이 함락된 이후 항복하였다.[* 오시 성 전투는 <노보우의 성>이라는 제목으로 [[소설]]화되었으며 2012년 11월 [[일본]]에서 [[영화]]로 개봉되었고(2011년 촬영이 완료되었고 9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[[도호쿠 대지진]]으로 인해 많은 장면을 수정했다고 한다) <[[노부나가의 야망]]> PS판에 군웅패권 모드로도 존재한다.] 오시 성 전투는 미츠나리가 총대장으로 참가한 최초의 [[전투]]임에도 보기 좋게 실패하여 이후로 '미츠나리는 전투에는 젬병'이라는 [[이미지]]가 굳어졌다. 그러나 현대 [[연구]]에 의하면 오시 성의 수공은 미츠나리의 판단이 아니라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[* 수공을 시작한 시기에 미츠나리와 히데요시가 주고받은 [[편지]]의 내용을 보면, 미츠나리는 수공에 반대했고 히데요시가 거듭 수공을 명령하였다. 히데요시가 저항하는 세력한테 자신의 힘과 재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[[퍼포먼스]]였다고 [[해석]]함이 타당하다. 더군다나 군사적 역량보다 행정업무에 더 밝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공을 시도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.]이 설득력을 얻었다. 현재 오시 성은 사라지고 없지만[* [[에도 시대]]에는 10만 석짜리 번(藩)으로 승격되어서 [[경제]]가 크게 번성했지만 [[메이지 시대]]에 폐성(廢城)되어 현재는 혼마루와 정문 등만 남았고 혼마루에는 향토 [[박물관]]이 있다고 한다.] 현재 [[지형]]과 당시 [[지도]]를 보아도 수공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지형이다. 오시 성 주변 지형은 [[평지]]인 데다 주변에 자연 제방으로 사용할 만한 [[구릉]] 등 지형이 없으며 오시 성은 [[저습지]]로 둘러싸였고, 미츠나리가 제방을 쌓은 [[장소]]에 비해 다소 고지대에 있는 등 도저히 수공을 펼칠 만한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.[* [[http://waterlotus.egloos.com/3414030|외부 링크]]에 있는 당시 평면도와 향토 박물관의 복원 모형만 보아도 [[육상전]]이 아니라 [[수상전]]을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보일 정도. 오죽하면 당시 오시 성은 '(물 위에) 떠 있는 성(浮き城)'이라고 불렸다고 한다.] 결정적으로 당시 쌓은 제방의 총 길이는 무려 28 km로, 아무리 다죠다이진(太政大臣)인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에게 지휘권을 일임받았다지만 일개 봉행(奉行)이 독단으로 실행할 만한 [[작전]]이 아니다. 기록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0만 명을 네댓새 만에 모집해서 이 제방을 만들었다. 엄청 높은 일당을 주고 인력을 모집했는데 [[소문]]을 듣고 먼 지방이나 심지어는 오시 성 안에서 농성 중이었던 [[백성]]들까지 이 돈에 혹해서 공사에 참여해서 도왔다고 한다.[* 10만 명 X 5일 X 10만 원으로 계산하면 500억 원이다. 이 중 1/10만 사용했다고 해도 5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